모순│ "이 소설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

2020. 6. 16. 16:25책check, 북애프터문!

모순

양귀자 │ 살림

 

#책check * 서평이라기 보다는 단상에 가깝습니다.

 

100쇄를 이미 훌쩍 넘겨버려 더이상 몇 쇄인지 세는 것 조차 무의미해진 책. 

한국 문학사에 이토록 멋진 작품이 있다는 게 자랑스러울 정도다. 

 

 

소설 자체가 너무 흥미롭고 재미있지만, 그 안에 담긴 인생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로 중간중간 멈춰서게 된다.

 

하지만 작가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읽어달라고 당부한다. 값비싼 보물처럼 귀하게 여겨달라고.

그치만 소설의 흡인력에 나의 자제력은 이미 무릎 꿇었다.

 

 

읽는 속도를 도저히 제어하지 못하고 한 권 내내 끌려다녀야 했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마지막 작가의 말까지 와있는 기현상. 

재미있어도 너무 재미있어서, 이상하리만치 재미있는 책이다.

무더웠던 7월이 지나고 8월이 되자 더위가 한 고비 꺾였다. 아직 그럴 때도 아닌데 아침 저녁으로는 서늘하기까지 했다. 이상저온 현상이라고 했다. 지난번 폭염도 대단했는데 그때도 기상대는 이상고온이라고 설명했다. 무엇이든 지나치면 다 이상한 것이라는 뜻일 터였다. 

어쩌면 촌스럽게도 제목과 너무도 일관된 서술들. 세상의 온갖 모순들의 집합체.

그 뻔한 전개가 작가의 수려한 표현력으로 어떻게 생동할 수 있는지 명징하게 보여준다. 

마음에 어떤 표시가 나타나야 결혼을 결정하게 되는 것인지 나는 정녕 알 수 없었다. 나는 몹시 궁금했다. 그가 나영규이든 김장우이든 아니면 전혀 다른 사람이든 간에, 이 사람과 결혼하고야 말겠어, 라는 결심은 언제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지금 결혼하여 살고 있는 다른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것일까.

"가족을 책임지지 않았어. 그건 옳지 못한 거야. 어떤 이유로도 합리화될 수 없어.(…) 잘못된 것은 언제라도 잘못된 거야. 
왜 거기에 자꾸 설명이 필요한지 나는 모르겠다."
그건 옳지 못한 거야, 라는 주리의 관용구. 주리는 바로 그 관용구 밑에 숨어서 더 이상은 세상 속으로 나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촘촘하게 배치된 등장인물들도 이 책의 주요 포인트.

어떤 인물도 허투루 설정하지 않았다. 

 

삶의 모순들,

편하게 얘기하라고 해놓고 편히 얘기하면 내가 니 친구냐는 상사,

권리를 옹호하는 단체들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낮은 권리(저임금, 과로 등),

살아가기 위해 일을 하지만, 출근하기가 죽기보다 싫은 직장인들.. 

수많은 모순들을 안고 살아가면서 늘어나는 건 회의감뿐이었다.

이런 모순덩어리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살아가야하지? 세상이 미친거야 내가 미친거야?

그런 모순들이 나를 한 발 더 나아가게 할 거라는 작가의 주문 아닌 주문에 묘한 위안이 된다.

 

소설 뒷편 내내 멋진 작가의 말에서 유달리 더 멋졌던 말.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살아가며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여주기 위해,

양귀자 작가는 모순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우릴 전지적 작가시점에 앉혀둔다. 

이 책 한권으로 작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양귀자작가의 답변은 충분하다. 완벽하게, 충분하다.